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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일본 도쿄 제국호텔, 진눈깨비 내리는 밤 자금 지원 거절을 마주한 청년 이재용

[대하소설 이재용 경영 실록 8회] IMF 외환위기와 도쿄 제국호텔의 결단: 5천만 달러 차입 거부와 태평로 어음 지급 보증

📖 대하소설 〈푸른 고삐와 거인의 왕관〉 시리즈 | ✍️ 저자: 안창성

대하소설 <푸른 고삐와 거인의 왕관> — 제8회: 검은 겨울의 서막과 부러진 뼈대

1997년 11월 일본 도쿄 제국호텔, 진눈깨비 내리는 밤 자금 지원 거절을 마주한 청년 이재용
▲ 도쿄 제국호텔 앞 진눈깨비 속에서 자금 회수 위기를 마주한 청년 이재용

1. 도쿄, 무너지는 첫 벽

1997년 11월, 신주쿠의 밤은 진눈깨비로 얼어붙어 있었다. 제국호텔 스위트룸의 낡은 온풍기가 삐걱거리며 뱉어내는 더운 바람에서는 곰팡내가 섞여 올라왔고, 탁자 위 녹차는 이미 식어 탁한 갈색으로 굳어 있었다. 청년 이재웅은 그 냄새 속에서, 도쿄 지사가 밤새 팩스로 쏘아 보낸 종이 더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마다 번진 토너 자국이 마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붉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 너머로 도쿄의 불빛들이 무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 불빛 하나하나가 지금 삼명을 등지고 있는 은행들의 창구라는 사실이, 재웅의 가슴을 서늘하게 짓눌렀다. 그는 수첩을 펼쳤다. 게이오기주쿠대 시절 함께 밤새 세미나를 준비하고, 시부야의 허름한 술집에서 미래를 논했던 이름들이 빼곡했다. 미쓰이, 스미토모, 다이이치칸교. 그 이름들 옆에는 전부 붉은 색연필로 취소선이 그어져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재웅은 세 번째 신호음에서야 수화기를 들었다.

“미스터 리, 미안하네만.” 미쓰이 은행 사토 전무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다. “본점 이사회가 한국계 자산의 국가 리스크를 최고 등급으로 올렸어. 지금 예치금을 강제 회수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해 주게.”

“사토상, 우리는 삼 년을 함께 일했습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당신은 제 서재에서 백년가약을 이야기했어요. 동양사학을 논하며 고개를 숙이셨던 분이 오늘은 왜 이렇게 다르십니까.”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미스터 리, 이건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야. 은행이라는 조직은 원래 그런 곳이야. 화창할 때 우산을 빌려주고, 비가 오면 그 우산을 가장 먼저 회수하지. 자네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그 비유, 오늘 밤 뼈에 새기겠습니다.”

“부디 살아남게, 미스터 리.” 뚝, 통화가 끊겼다.

재웅은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창밖 저 멀리, 도쿄 타워의 붉은 불빛이 마치 사형 선고처럼 이글거렸다. 그는 다시 수첩의 다음 이름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스미토모의 다나카 상무. 신호음이 다섯 번 울리도록 아무도 받지 않았다. 여섯 번째 신호음 끝에 비서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다나카 상무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재웅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 밤, 도쿄의 모든 문이 동시에 닫히고 있었다.

지금 당장 5천만 달러를 확보하지 못하면, 다음 주 월요일 기흥 라인은 멈춘다. 삼명이, 창업 이래 단 한 번도 무릎 꿇지 않았던 그 거인이, 부도 유예라는 이름의 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재웅은 안경을 벗어 던지고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도련님.” 비서실장 강 상무가 숨을 몰아쉬며 들어섰다. 코트에는 아직 진눈깨비가 녹지 않은 채 묻어 있었다. “구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협력업체들이… 오늘 밤 안양 공단에서 집단 항의 집회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재웅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몇 곳이나?”

“백 이십여 곳입니다. 삼명이 발행한 어음을 은행이 전부 할인 거부했다고… 사장들이 자살 소동까지 벌인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5천만 달러의 벽 앞에서 정신을 곤두세우고 있던 재웅에게, 이번에는 등 뒤에서 또 다른 칼날이 날아든 것이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무너지고 있었다. 하나는 자금, 하나는 사람.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강 상무님. 첫 비행기로 서울로 갑니다.”

“도쿄 쪽 협상은… 아직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가시는 겁니까.”

재웅은 흩어진 팩스 서류들을 천천히 정리해 가방에 쓸어 담았다. “성과는 서울에 가서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안양 공단, 멈춰선 기계와 약속어음 부도 위기에 절망하는 협력업체 사장들
▲ 1997년 안양 공단, 멈춰선 기계와 부도 위기 속 협력업체 사장들의 처절한 고통

2. 안양 공단, 무너지는 사람들

같은 시각, 안양 공단의 삼우화학 공장. 명식은 멈춰 선 기계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기계는 일주일째 녹슬어가고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나가 깜빡이는 낡은 사무실 안, 그의 손에 쥐어진 세 장의 약속어음은 삼명이 발행한 것이었지만, 은행 창구 직원은 그것을 이제 휴지 조각 취급했다.

“삼명 이름으로 발행된 어음은 오늘부로 할인이 중지되었습니다.” 직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명식은 지난 이십 년간 이 공장을 일구며 삼명이라는 이름만 믿고 살았다. 자식들의 학자금을, 아내의 반지를, 살던 집까지 담보로 걸어 설비를 늘렸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를 만드는 삼명에 불화수소를 납품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온 세월이었다.

“사장님.” 젊은 오퍼레이터 민석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손에는 낡은 작업복이 들려 있었다. “저… 다음 달 결혼식은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반지도 오늘 팔았어요.”

명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구멍이 뜨겁게 조여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삼명의 파란 캘린더를 와락 움켜쥐어 찢었다.

“우리에게 일류 삼명은 희망이 아니라… 피를 빠는 거머리였단 말인가!”

그 외침이 공장 마당에 울려 퍼지자, 어느새 모여 있던 다른 협력업체 사장들도 하나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옆 공장의 최 사장이 소주병을 든 채 비틀거리며 걸어와 명식의 어깨를 붙잡았다. “명식이 형, 우리 회사도 오늘 부로 부도야. 삼십 년 일한 회사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군가 소리쳤다. “오늘 밤 본사로 갑시다! 가서 따집시다!” 함성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트럭 몇 대에 사람들이 올라타기 시작했다. 공구함과 작업복을 그대로 걸친 채, 얼굴에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안양에서 태평로까지, 검은 밤을 뚫고 분노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민석은 자신도 모르게 그 트럭 중 한 대에 올라탔다. 함께 탄 나이 든 기술자가 그에게 말했다. “이보게, 젊은 사람이 이런 데 껴서 뭐 하나. 자네는 아직 살 날이 많잖아.” 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저도 오늘 제 미래를 팔았습니다. 끝까지 보고 싶습니다.”

서울 톨게이트 빗길을 뚫고 태평로 본관으로 달리는 협력업체 트럭들의 비장한 질주
▲ 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해 태평로 본관으로 질주하는 협력업체 트럭 행렬

3. 태평로, 정문이 열리다

김포공항에 내린 재웅은 차 안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협력업체 트럭 행렬이 이미 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했다는 보고였다. 운전기사가 물었다. “본사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우회하시겠습니까?”

옆자리에 앉은 강 상무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도련님,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미 언론사 두 곳에서 취재진을 보냈다는 첩보도 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직접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차라리 오늘 밤은 신라호텔에서 대기하시고, 내일 아침 대변인을 통해 입장을 발표하는 게…”

재웅은 잠시 눈을 감았다. 참모들이라면 분명 우회를 권할 것이었다. 폭도로 변한 군중 앞에 후계자가 직접 나서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하지만 재웅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본사로 갑니다. 그리고 정문을 여세요.”

“도련님!”

“강 상무님. 지금 저 사람들이 원하는 건 대변인의 성명서가 아닙니다. 사람의 얼굴입니다.”

태평로 본사 앞은 이미 트럭과 사람들로 뒤엉켜 있었다. 경비들이 정문을 막아서고 있었고, 확성기를 든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삼명은 우리 피땀을 빨아먹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는가!” 명식과 민석도 그 무리 속에 있었다. 진눈깨비 섞인 찬바람이 사람들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재웅의 검은 세단이 그 앞에 멈춰 서자, 순간 함성이 멎었다. 경비 하나가 다급히 무전을 날렸다. “도련님 차량 도착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재웅은 무전을 가로채 짧게 답했다. “정문 여세요.”

철제 정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문이 열리고 재웅이 내렸다. 경호원도, 참모도 없이, 혼자였다. 진눈깨비가 그의 어깨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백여 명의 눈동자가 일제히 한 청년에게 쏠렸다.

“여러분.” 재웅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떨리지 않았다. “저는 오늘 밤 도쿄에서 5천만 달러를 구걸하다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돈이 없으면 다음 주 기흥 라인이 멈춥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오늘 밤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누군가 소리쳤다. “그래서 우리 어음은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 가족은 어떻게 먹고 삽니까!”

재웅은 그 목소리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명식 앞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채 한 걸음이 되지 않았다.

“사장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명식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의 청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순간 압도되었다. “…박명식이오.”

“박 사장님. 제가 오늘 밤 이 자리에서 약속드릴 수 있는 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드리겠습니다. 본사 구조조정안에 협력업체 어음 우선 결제 조항을 제 손으로 넣겠습니다. 본사 인력보다, 여러분의 공장이 먼저 숨을 쉬어야 합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뒤편에서 누군가 냉소적으로 외쳤다. “말은 쉽지! 어제도 그런 말 들었소!” 재웅은 그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최 사장이었다. 소주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는 그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재웅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사장님 성함은요.”

“…최영도요. 삼십 년을 삼명만 믿고 살았소. 오늘 아침 부도가 났소.”

재웅의 얼굴이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이 말로 사장님의 삼십 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 압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의 최 사장님이 나오지 않게 막는 것뿐입니다.”

참모 하나가 다급히 다가와 귓속말했다. “도련님, 지금 그런 약속을… 회사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너무 위험합니다.”

재웅은 그 손을 조용히 뿌리쳤다.

“버티지 못하면, 그건 제 책임입니다.”

그 한마디에 명식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마당을 가득 메웠던 분노의 열기가, 서서히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민석은 트럭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한밤중 태평로 삼성 본관 철문을 열고 협력업체 가족들과 정면으로 마주 선 청년 이재용
▲ 한밤중 태평로 삼성 본관 정문을 활짝 열고 노동자들과 마주 선 청년 이재용

4. 태평로 집무실, 두 번째 벽

밤 열 시가 넘어서야 마당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재웅은 그들 한 명 한 명과 짧게라도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았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명식이 돌아서기 전, 재웅에게 나직이 말했다.

“도련님, 오늘 밤 이 약속… 잊지 마시오.”

“잊지 않겠습니다. 잊는 순간 저는 삼명의 이름을 쓸 자격이 없는 겁니다.”

집무실로 돌아온 재웅은 넥타이를 풀지도 못한 채 의자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러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급보가 날아들었다. 재무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련님. 미국 씨티은행에서도 오늘 자로 신용장 회수를 통보해 왔습니다. 이대로면… 사흘 안에 삼명은 실질적으로 부도 상태에 들어갑니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도쿄에서 무너진 벽에 이어, 이번에는 뉴욕에서마저 문이 닫힌 것이다. 참모들의 얼굴에는 이제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 누군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끝인가…”

재무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게다가 오늘 낮 약속하신 협력업체 우선 결제 조항까지 반영하면, 삼명의 현금 유동성은 사흘이 아니라 이틀로 줄어듭니다.”

임원 하나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도련님, 이건 무모한 결정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본사 존립이 위태로운데 협력업체 우선 결제라니요!”

재웅은 그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조부와 함께 말고삐를 쥐고 찍은 어린 시절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어린 재웅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삐를 움켜쥐고 있었고, 조부는 그 옆에서 웃으며 손을 얹고 있었다.

조부는 늘 이렇게 말했었다. “고삐를 쥔 손이 흔들리면, 말은 그것을 먼저 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랫사람이 무너지면 위에 있는 사람도 함께 무너지는 법이다.”

재웅은 사진을 내려놓고 참모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스위스 은행 쪽 라인은 아직 살아있습니까.”

재무팀장이 놀라 되물었다. “네? UBS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쪽은 삼명과 직접 거래가 없는데…”

“제 개인 인맥이 있습니다. 취리히에 있는 대학 동창에게 지금 당장 전화를 걸겠습니다. 담보는 제 개인 지분을 걸겠습니다.”

방 안이 다시 술렁였다. 후계자가 자신의 지분을 담보로 내놓겠다는 것은 전례 없는 파격이었다. 나이 든 임원 하나가 조심스레 만류했다. “도련님, 그것은 너무 위험한 결정입니다. 만에 하나 잘못되면 도련님 개인의 지분마저 잃게 됩니다.”

“잘못되면 저 혼자 무너지는 겁니다.” 재웅이 잘라 말했다. “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만 오천 명이 함께 무너집니다. 그리고 오늘 밤 제가 안양의 박 사장님께 드린 약속도 함께 무너집니다.”

새벽 여명 속 태평로 광장, 협력업체 대표의 거친 손을 꼭 맞잡고 어음 전액 보증을 선언하는 청년 이재용
▲ 차가운 새벽 여명 속, 협력업체 사장의 거친 손을 맞잡고 생존을 약속하는 이재용

5. 취리히로 거는 마지막 전화

재웅은 참모들을 물리고 홀로 수화기를 들었다. 시차를 계산하니 취리히는 오후 세 시였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재웅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하인리히, 나야. 재웅이야.”

수화기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웅! 이 시간에 웬일이야? 요즘 뉴스에서 한국 얘기가 매일 나오던데, 자네 괜찮은가?”

“솔직히 말하면, 안 괜찮아.” 재웅은 짧게 숨을 골랐다. “하인리히,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사적인 부탁이야.”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해봐.”

재웅은 상황을 설명했다. 도쿄에서 신용장이 회수됐고, 뉴욕에서도 같은 통보가 왔으며, 사흘 안에 5천만 달러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담보로 자신의 개인 지분을 내놓겠다는 것까지.

긴 침묵이 흘렀다. 재웅은 심장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이 통화가 마지막 카드였다.

“재웅.” 하인리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대학 시절 십 년을 함께 보내면서 자네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런 자네가 이렇게 전화를 걸었다는 건, 정말 벼랑 끝이라는 뜻이겠지.”

“…맞아.”

“좋아. 내가 이사회를 설득해볼게. 완전한 정식 대출은 시간이 걸릴 거야. 하지만 임시 브릿지론이라면, 내 개인 신용을 걸고 사흘 안에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아.”

재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안도감과 함께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인리히, 고마워. 이 은혜는…”

“은혜는 무슨. 대학 시절 자네가 내 논문 밤새 봐준 거, 나 아직 기억하고 있어.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뭐든 말해.”

“살아남아. 그리고 이 위기를 넘긴 다음에, 나한테 그 이야기를 직접 들려줘. 오늘 밤 자네가 어떻게 버텼는지.”

6. 새벽, 부러지지 않은 뼈대

새벽 세 시, 취리히와의 통화가 연결되었다. 긴 협상 끝에, 하인리히는 개인적 신뢰를 걸고 임시 브릿지론을 확정해 왔다.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다. 이틀의 유동성 부족을 메우는 응급 처방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흘의 숨통이 트인 것이다.

재웅은 전화를 끊고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그를 짓눌렀던 두려움과, 협력업체 앞에서 뱉었던 무거운 약속과, 조부의 오래된 목소리가 뒤엉켜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강 상무가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도련님, 이제 좀 쉬셔야…”

재웅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서류철을 다시 끌어당겨, 빨간 볼펜으로 정리해고 비율을 사정없이 그어 내리기 시작했다. 협력업체 우선 결제, 본사 인력 감축 최소화, 그 대신 임원 급여 삭감 폭을 세 배로. 참모들은 밤새 몇 번이고 만류했지만, 재웅의 결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재무팀장이 결국 조용히 물었다. “도련님,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재웅은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기흥 공장에서 화상을 입었던 그날, 강 반장이라는 분과 컵라면을 나눠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그러시더군요. ‘도련님, 회사가 크다고 사람이 작아지는 건 아닙니다.’ 그 말을 오늘 밤까지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 겨울은.” 재웅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쿄도 뉴욕도 우리에게 등을 돌렸고, 앞으로 몇 달간 얼마나 더 많은 문이 닫힐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무릎 꿇을 겨울은 아닙니다.”

창밖 진눈깨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대신 차갑고 맑은 새벽바람이 태평로의 어두운 거리를 훑고 지나갔다. 거인은 여전히 부러진 다리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뼈대 속에 흐르는 뜨거운 피만은, 아직 식지 않았다.

안양 공단, 명식의 공장에도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명식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멈춰 선 기계 앞을 지키고 있었다. 민석이 다가와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았다.

“사장님, 그 도련님… 정말 약속을 지킬까요.”

명식은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키지 않으면, 우리가 가서 다시 물을 거다. 어젯밤 그 눈빛은… 거짓말하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어.”

멀리 동쪽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세기말의 가장 어두웠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검은 겨울이, 아직 끝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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