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경북 구미 공단, 애니콜 무선전화기 조립 라인의 치열한 현장
지독하리만큼 매운 납땜 연기와 웅웅거리는 콘베이어 벨트의 소음이 24시간 내내 고막을 찢어발기던 경상북도 구미의 무선전화기 조립 라인은, 열여덟 살 소녀 선희에게 하루하루가 살아있는 지옥이자 동시에 가난한 가족을 먹여 살릴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전라남도 고흥의 메마른 황토밭을 떠나 이곳 구미 공단의 회색 콘크리트 빌딩 숲으로 흘러 들어온 선희는, 매일 아침 여섯 시면 덜덜거리는 통근버스에 몸을 싣고 공장 문을 들어서며 가슴속 깊이 서늘한 번민을 삼켜야 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미세한 키패드 고무를 플라스틱 기판 위에 납땜하고 핀셋으로 고정하는 반복적인 노역 때문에 온통 누렇게 절어 있었고, 납 가루가 살갗을 파고들어 손톱 가장자리는 늘 갈라져 피가 고여 있었다.
열네 시간의 살인적인 교대 근무가 끝나고 나면 눈앞에 노란 잔상이 아른거렸고, 환기 팬이 제대로 돌지 않는 작업대 위로 떨어지는 붉은 납 불꽃은 흡사 자신의 청춘이 조금씩 타들어 가는 서글픈 제단처럼 느껴졌다. 당시 삼전이 모토로라라는 거대한 세계적 괴물을 꺾기 위해 야심 차게 내놓은 무선전화기 애니콜의 조립 라인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전쟁터였다. 불량률을 단 0.1%라도 낮추기 위해 줄지어 선 관리자들의 매서운 호통과 감시의 눈길이 여공들의 등덜미를 사정없이 후려쳤고, 수율이 떨어지는 날이면 화장실조차 제시간에 가지 못해 방광염을 앓으면서도 묵묵히 핀셋을 쥐어야 했던 것이 그 시절 구미 공단 여공들의 잔인한 일상이었다.
선희와 동료들이 하루에 수천 번씩 문지르고 조립하던 기기들은 단순한 전자제품이 아니라, 그들의 멀어져 가는 시력과 굳어버린 어깨, 그리고 주말도 반납한 채 가문으로 보내야 했던 피눈물 젖은 월급봉투의 무게 그 자체였다. 그러나 1994년 가을부터 기흥 공단과 서울 태평로를 거쳐 구미의 척박한 공기 속으로 밀려 들어온 청년 이재용의 눈에 비친 현장은, 화려한 기술 대국의 간판 뒤에 숨겨진 인간의 참혹한 소외와 뼈를 깎는 희생의 적나라한 전시장일 뿐이었다. 기획실 사원이라는 단출한 직함을 달고 구미 공장 구석방에 자리를 잡은 청년은, 매일 아침 눈이 벌갛게 충혈된 채 교대 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어린 여공들의 지친 발걸음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도덕적 부채감에 짓눌려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누리는 그 장엄한 권력과 화려함의 원천이 바로 저 여공들의 짓이겨진 손가락 끝과 시려오는 무릎팍 위에 가혹하게 세워진 성벽이라는 사실을, 청년은 매 순간 심장이 저려오도록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삼전의 무선전화기 불량률이 통제 불능의 상태인 11.8%까지 치솟으며 사방에서 파멸의 경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현장의 공기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질식할 듯 팽팽하게 굳어버렸다. 통화 도중에 기계가 제멋대로 꺼지고, 액정 화면에 시커먼 얼룩이 지며, 송수신 안테나가 툭하면 부러져 버리는 치욕적인 결함 사태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삼전의 자존심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 처참하게 짓밟혔다. 시장에서는 삼전 전화기를 두고 냉장고나 세탁기나 만들던 놈들이 장난감 모조품을 만들어 판다며 차가운 조롱을 퍼부었고, 대리점에는 환불과 교환을 요구하며 분노한 소비자들의 거친 고함과 내던져진 기기들의 파편이 넘쳐났다.
본사의 수뇌부들은 이 미증유의 사태 앞에서 이성을 잃었고, 그 분노의 화살은 고스란히 가장 약하고 힘없는 먹이사슬의 최하단으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구미 공장으로 내려온 본사의 기술 이사들과 감찰 팀원들은 붉은 완장을 찬 저승사자처럼 군림하며 여공들의 조립 라인을 샅샅이 뒤졌고, 미세한 조립 불량의 책임을 여공들의 미숙한 손놀림과 기강 해이로 몰아가며 모진 폭언을 퍼부었다. 그 가혹한 압박감 속에서 선희는 밤마다 기숙사 2층 침대 구석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없이 흐느껴 울어야 했다. 내가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조립한 기계가 왜 쓰레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왜 우리가 이 모든 치욕과 비난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지 그 서러움은 뼛속까지 시려왔다.
하지만 진짜 나락은 구미 공장에 껍데기 플라스틱 사출 케이스를 납품하던 소규모 협력업체 대성정밀의 사장 명식에게 들이닥친 잔인한 불행이었다. 명식은 평생 일구어온 작은 공장과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사채까지 끌어다 삼전의 애니콜 케이스 규격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최신 사출 성형 기계를 들여놓았으나, 본사의 일방적인 규격 변경과 단가 인하 압박 속에서 숨통이 막혀가고 있었다. 사출기의 온도 노즐이 미세하게 흔들려 케이스 표면에 머리카락보다 얇은 미세 스크래치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삼전 감찰 팀은 대성정밀의 납품 물량 전체를 전량 반려했고, 거래처 등록 취소라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공문을 명식의 눈앞에 가차 없이 내던졌다. 부도 위기에 몰려 갈 길을 잃은 명식은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시린 오후, 구미 공장 본관 로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삼전의 젊은 과장들과 대리들은 지나가는 여공들이 보는 앞에서 명식의 멱살을 잡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거칠게 밀쳐냈고, 그의 머리 위로 반려된 사출 케이스 더미를 사정없이 쏟아부으며 쓰레기 같은 물건을 들고 와서 어디서 행패냐며 멸시 섞인 침을 뱉었다. 명식은 흩어진 플라스틱 조각들을 피가 나는 손끝으로 주워 담으며, 내 자식들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제발 한 번만 살려달라고, 납기를 맞추기 위해 삼일 밤낮을 잠 한 숨 못 자고 기계 앞에서 기름을 뒤집어썼던 내 동생들을 봐서라도 제발 기회를 달라고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 광경을 로비 구석의 어두운 기둥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청년 이재용의 심장은 사정없이 칼로 도려내지는 듯한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
▲ 구미 공장 로비 바닥에 무릎을 꿇고 협력업체 사장의 거친 손을 감싸 안은 청년 이재용
가죽 글러브를 끼고 야구장에서 친구들과 호쾌하게 소리 지르던 소년의 순수함도, 기숙사 방에서 밤을 새우며 세계 경제를 논하던 하버드 박사의 세련된 이론도 이 처절한 생존의 아비규환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비겁한 위선에 불과했다. 재용은 주먹을 너무 세게 쥔 나머지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명식의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갔다. 그리고 삼전의 고고한 간부들이 경악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차가운 흙먼지가 서린 로비 바닥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명식의 거칠고 기름때 묻은 손을 두 손으로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눈이 멀어 사장님의 피땀을 모른 체했습니다. 제 가문의 이름이 사장님과 대성정밀 가족들의 목숨을 짓밟았습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청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명식의 굳은살 박힌 손등 위로 차갑게 흘러내렸다.
대한민국 최대 재벌의 황태자가 한낱 하청업체 사장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로비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정적에 휩싸였다. 명식은 멍하니 청년의 눈물을 바라보았고, 재용은 비서진의 다급한 만류를 뿌리친 채 명식을 이끌고 자신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건네며 약속했다. 사장님의 사출 기술이 흔들린 것은 사장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가 기술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고 단가만 깎으려 들었던 오만함 때문입니다. 제가 직접 기술 연구소 엔지니어들을 대성정밀 공장으로 보내 사출기 압력 노즐 설계를 처음부터 다시 잡아드리겠습니다.
부도는 결코 없을 것이니, 제발 힘을 내어 저와 함께 다시 한 번 삼전의 미래를 만들어 주십시오. 그 뭉클한 구원의 비화가 구미 공단 구석구석으로 가랑비처럼 스며들며 여공들과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작은 신뢰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할 무렵,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어두운 회의실에서 날아든 부친 이건희 회장의 청천벽력 같은 사자후는 구미 전체를 거대한 화염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품질은 삼전의 목숨이며, 불량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지금 당장 시중에 유통된 불량 애니콜 무선전화기 15만 대를 전량 회수하여, 구미 공장 운동장에서 단 한 대도 남김없이 전량 불태워 장례를 지내라.
▲ 구미 공장 운동장 한가운데 성벽처럼 차갑게 쌓여 있는 15만 대의 애니콜 전화기 상자
150억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거대한 자본의 덩어리를 단 한순간에 연기로 날려버리라는 총수의 무자비하고 단호한 명령이었다.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구미 공장은 말 그대로 거대한 곡소리와 절망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여공들에게 그 15만 대의 전화기는 단순한 플라스틱과 기판의 덩어리가 아니라, 지난 수년간 매일 밤 매캐한 납땜 연기를 마시며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가며 밤샘 근무로 만들어낸 자신들의 눈물겨운 청춘의 파편이자 영혼의 분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손가락이 굳어지도록 일했단 말인가.
우리가 만든 기계들이 한낱 쓰레기처럼 불태워져야 할 만큼 가치 없는 존재였단 말인가. 여공들은 조립 대 위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망연자실했고, 협력업체 직원들은 자신들의 기술력이 온 천하에 불량품으로 낙인찍혀 화형식을 당한다는 치욕감에 밤마다 술을 들이키며 가슴을 쳤다. 마침내 1995년 3월 9일, 구미 공장 운동장 한가운데에는 높이가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철제 소각대와 함께 눈물겨운 15만 대의 애니콜 전화기 상자들이 거대한 성벽처럼 차갑게 쌓여 있었다. 운동장을 에워싼 이천 명의 구미 공장 임직원들과 여공들의 이마에는 붉은색 머리띠가 질끈 묶여 있었고, 그들의 눈빛에는 서러움과 분노, 그리고 지독한 부끄러움이 엉켜 흐르고 있었다.
단상 위로 걸어 나온 이재용은 바람결에 흩날리는 재 한 줌을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이 가혹한 화형식은 단순한 품질 쇼가 아니라, 과거의 낡고 타협적인 삼전을 자기 손으로 장례 지내고 오직 완벽한 일류의 기술력으로만 움직이는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는 처절한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갈 이천 명 여공들의 자존심과 눈물을 어루만져 주지 못한다면, 이 화형식은 한낱 자본가의 잔인한 불장난에 불과할 터였다. 재용은 마이크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운동장 구석구석을 찌르듯 울려 퍼졌다. 사우 여러분,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모여 피눈물을 흘리고 계신 협력업체 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불태우는 것은 여러분의 고귀한 땀방울이 아닙니다. 오늘 불타는 것은 여러분의 그 헌신적인 노력을 일류의 기술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불량 부품을 납품받아 방치했던 우리 삼전 경영진의 무능함과 나태함입니다.
▲ 1995년 3월 9일, 150억 원 상당의 불량 제품을 불태우며 초격차 품질을 선언한 역사적 화형식
여러분의 손가락 상처와 눈물을 삼전의 차가운 시스템이 제대로 보듬지 못해 이 치욕의 불길을 지피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슬픔과 분노의 화염을 똑똑히 기억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 구미 공단 운동장 위로 우리의 자존심이 쓰레기처럼 불타오르는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저 이재용이 여러분의 방패가 되고 여러분의 손끝을 지키는 든든한 동지가 되겠습니다. 오늘 이 불꽃은 삼전의 몰락이 아니라, 오직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우리 모두의 눈물겨운 부활의 신호탄입니다.
청년의 서럽고도 단단한 진심이 이천 명 여공들의 가슴속에 거대한 파도로 들이닥쳤을 때, 거대한 해머를 든 인부들이 전면으로 나서서 쌓여 있던 애니콜 상자들을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콰광, 콰직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기판이 깨지고 플라스틱 케이스가 산산조각이 나며 공중으로 파편이 튀었다. 여공들은 서로의 어깨를 조여 안고 목놓아 울부짖기 시작했고, 선희는 차가운 운동장 모래바닥에 주저앉아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인부들이 깨진 파편 더미 위로 시커먼 휘발유를 사정없이 뿌리고 횃불을 던지는 순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시뻘건 불길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매캐한 연기와 플라스틱 타는 고약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구미의 차가운 하늘을 시커넓게 뒤덮었고, 이천 명의 통곡 소리는 거대한 화염의 포효 속에 묻혀 흘러갔다. 이재용은 그 지옥 같은 불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섭씨 수백 도가 넘는 이글거리는 열기가 안경 유리를 깨뜨릴 듯 밀려왔고 살갗이 타 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뺨을 적셨지만, 청년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타오르는 불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꺼져가는 불길 속에서 시커넓게 그을린 채 반쯤 녹아내린 애니콜 플라스틱 케이스 조각 하나를 맨손으로 가만히 집어 올렸다.
▲ 시커멓게 그을린 플라스틱 케이스 조각을 맨손으로 쥐고 세계 최고가 되겠노라 다짐하는 이재용
손바닥 피부가 열기에 아스라이 타들어 가며 붉은 진물이 솟구쳤지만, 청년은 그 지독한 고통을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 일류의 낙인처럼 새겨 넣었다. 이 매캐한 연기 냄새를, 여공들의 피눈물 나는 서러움을, 그리고 협력업체 사장 명식의 간절한 눈빛을 평생 잊지 않겠노라고. 삼전이 세계의 정점에 서는 그날까지 이 가혹한 화형식의 불꽃을 내 심장 속에 꺼지지 않는 화두로 간직하겠노라고 청년은 독하게 다짐했다. 빗물 섞인 시커먼 연기가 구미 공단의 공장 굴뚝 사이로 흩어지며 마침내 잔인했던 화형식의 불길이 사그라들었을 때, 여공들과 협력업체 직원들의 눈빛은 예전의 절망과 수치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모토로라를 꺾고 세계 최고의 전설을 내 손으로 직접 쓰겠다는 지독하고도 처절한 야성으로 무장된, 새로운 거인의 눈빛들이었다. 잿더미 위로 차가운 밤이슬이 내리고 가로등 불빛이 젖은 운동장 바닥을 고즈넉하게 비추는 밤, 청춘들의 매운 눈물과 타오르던 열기는 삼전의 푸른 심장 속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거대한 에너지로 고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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