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하소설 《푸른 고삐와 거인의 왕관 — 삼성 이재용편》 제2회: 붉은 흙과 양은냄비 16:9 시네마틱 하이라이트 영상
대하소설 삼성이재용 – 제2회: 붉은 흙과 양은냄비
대하소설 《푸른 고삐와 거인의 왕관 — 삼성 이재용편》 | anchangseongbank.blog
1984년 초봄의 어느 스산한 오후, 종로구 필운동에 자리 잡은 경복고등학교 교무실은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의 학적부를 정리하는 교사들의 손길로 분주했다. 먼지 서린 창틀 사이로 가늘게 쏟아지는 이른 봄볕 속에서, 1학년 3반 담임인 국어 교사 강창식은 누렇게 바랜 종이 더미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안경을 고쳐 썼다. 아이들의 가정환경과 부모의 직업이 빼곡히 적힌 종이들은 그 시대 교사들에게 일종의 보물지도이자, 때로는 조심스러운 경계경보이기도 했다. 장안의 명문가 자제들이 수두룩하게 모인다는 경복고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강창식의 손끝이 한 서류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학생 이름 이재용. 주소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그리고 부친 성명란에 뚜렷이 인쇄된 세 글자, 이건희. 강창식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대한민국 경제의 거대한 심장, 삼성의 후계자가 자신의 반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서둘러 서류를 밑으로 내려 부친 직업란을 확인했다. 대기업 회장, 혹은 그룹 총수라는 화려한 단어가 적혀 있을 것이라 짐작하며 눈길을 준 순간, 강창식의 입에서 피식 하고 허탈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런 모조지 위에 얌전하게 박혀 있는 활자는 단 세 글자였다.
회사원.
강창식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학적부를 툭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인물의 직업이 단지 월급을 받고 일하는 평범한 회사원이라니. 이 녀석 보게, 꽤 싱거운 구석이 있네. 담임은 교무실 창 너머로 흙먼지가 부옇게 이는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낡은 체육복 바지를 흙바닥에 문지르며 축구공을 쫓아 달리는 아이들이 엉켜 있었다. 그 틈바구니 어딘가에 대한민국 최대 재벌의 장남이 섞여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강창식의 눈에는 도무지 누가 그 특별한 아이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교실 안에서도 그는 늘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아 칠판만 응시하던 얌전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방과 후, 교실의 소음이 완전히 잦아들었을 무렵 강창식은 교무실로 이재용을 불렀다. 주황색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소년 이재용은 헐렁한 교복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얌전하게 서 있었다. 얼굴에는 수줍은 기색이 역력했고, 담임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가끔 바닥으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강창식은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학적부를 넓게 펼쳤다.
재용아,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말이다. 너 여기 학적부에 부친 직업을 회사원이라고 적어 놓았더구나.
예, 선생님.
소년은 나지막하지만 또박또박 대답했다. 강창식은 헛기침을 한 번 크게 하고는 학적부 모서리로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툭 쳤다. 전혀 아프지 않은, 그러나 교사로서 부리는 장난 섞인 훈계였다.
이 녀석아, 아버지가 회사원이면 나나 여기 학교 앞 문방구 주인이나 다 똑같은 회사원이고 자영업자냐? 아버지가 이건희 회장이신데, 굳이 회사원이라고 적어서 담임인 나를 시험하려는 게냐? 아니면 담임이 돈이라도 뜯어낼까 봐 겁이 나서 그랬어?
그 순간 소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소년은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안경 너머의 맑은 눈망울에 미안함과 고독함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소년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진짜 회사원이 맞으십니다, 선생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양복을 입고 회사로 출근하셔서 밤늦게까지 일만 하십니다. 제 눈에는 그저 나라를 위해, 그리고 회사를 위해 일하시는 많은 회사원 중 한 분일 뿐입니다. 제가 친구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소년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어떤 단단한 진심이 들어 있었다. 강창식은 깊게 숙인 소년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묘한 울림을 느꼈다. 이 아이는 자신이 가진 거대한 왕관의 무게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더 평범한 흙먼지 속으로 숨어들려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담임은 길게 한숨을 쉬며 소년의 어깨를 토닥였다.
알았다, 이 녀석아. 들어가 봐라. 내일부터는 청소 빼먹지 말고 똑바로 하고.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년은 그제야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교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강창식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아무리 소년이 평범해지려 애써도, 그가 삼전이라는 거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교실의 창틀 틈새로 새어 드는 가랑비처럼 아이들 사이에 은밀하게 퍼져 나갔다.
특히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 거친 가죽 가방을 책상 위에 툭 던져놓기 일쑤였던 민우는 이재용이라는 존재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우는 달동네 좁은 방에서 오대양 육대주를 꿈꾸며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거친 소년이었다. 매일 아침 구멍 난 양말을 꿰매 신고 등교하던 민우에게, 온몸에서 부드러운 우유 냄새를 풍기며 얌전하게 앉아 있는 이재용은 존재 자체로 일종의 폭력이자 위선이었다.
영어 수업 시간은 늘 소년 이재용의 독무대였다. 원어민 교사가 던지는 질문에 재용이 막힘없이 매끄러운 영국식 발음으로 대답할 때마다, 교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신기한 동물을 보듯 재용을 바라보았고, 교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 민우의 야유 섞인 목소리가 교실의 침묵을 깨뜨렸다.
에이, 발음 더럽게 굴리네. 영국 놈들 똥구멍이라도 핥다 왔나 보지?
교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원어민 교사는 한국어를 다 알아듣지 못해 갸웃거렸지만, 재용은 들고 있던 영어 교과서의 모서리를 꽉 쥐었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재용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는 다리를 비딱하게 꼰 채 침을 뱉는 시늉을 하며 재용을 도발했다. 교실을 가득 채운 팽팽한 긴장감은 수업이 끝난 후에도 가시지 않았다.
방과 후, 우중충한 먹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이내 굵은 장대비가 운동장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흙바닥이 순식간에 진흙탕으로 변해갔고, 교실을 나선 아이들은 우산을 펴 들고 서둘러 교문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우산이 없던 민우는 가방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스탠드 아래 그늘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때, 회색 우산을 받쳐 든 재용이 민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우산 같이 쓰고 갈래? 나 한남동 방향인데, 가는 길에 내려줄게.
민우는 재용의 우산과 그의 단정한 구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우산 끝을 손으로 밀쳐냈다.
야, 이재용. 가식 좀 떨지 마라. 네가 우리랑 똑같은 교복 입고 얌전한 척 앉아 있으니까 진짜 우리랑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냐? 친구 자취방 가서 라면 끓여 먹고 낄낄대면 네가 서민이라도 된 것 같아? 어차피 고등학교 졸업하면 저 먼 미국이나 유럽으로 쌩 하니 날아가 버릴 놈이, 왜 여기 남아서 진짜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우리 같은 애들 기분 더럽게 만드는데? 네 동정심 따위 필요 없으니까 저리 꺼져.
민우의 목소리에는 깊은 열패감과 억울함이 뒤섞여 있었다. 세상의 모든 불공평함에 대한 분노가 눈앞의 조용한 소년에게 화풀이하듯 쏟아진 것이다.

재용은 밀쳐진 우산대를 다시 고쳐 쥐었다. 빗방울이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적셨지만,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안경 너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재용은 우산을 바닥에 던져두고 민우의 옷깃을 잡았다. 늘 온화하기만 하던 소년의 몸에서 전례 없는 격한 기운이 뿜어 나왔다.
내 말이 가식처럼 들려? 내가 삼전의 아들이라서 내 슬픔이나 내 고독은 다 짜짜가 같아 보이는 거야? 나도 너희와 똑같이 웃고 싶고, 똑같이 라면 끓여 먹으며 이야기 나누고 싶어.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이 자리에 태어난 게 아니잖아! 나도 아침마다 눈을 뜰 때마다 세상의 시선이 두렵고 무서워. 왜 내 진심을 단 한 번도 보려고 하지 않고 위선이라고만 하는 건데!
빗소리에 묻힌 소년의 절규는 서럽고도 날카로웠다. 민우는 의외의 반격에 멍하니 재용을 바라보았다. 재용의 단정한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주먹을 꽉 쥔 채 숨을 몰아쉬는 재용의 전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세상이 주는 찬란한 왕관 대신, 그저 한 사람의 친구로 인정받고 싶었던 외로운 십 대 소년의 처절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민우는 움켜쥔 주먹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장대비는 두 소년의 머리 위로 무자비하게 내리쳤고, 운동장의 붉은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러갔다. 한참을 그렇게 대치하던 민우는 자기도 모르게 실소했다.
너… 진짜 멍청한 녀석이구나. 그 돈 다 놔두고 왜 여기서 눈물 콧물 짜고 앉아 있냐.
민우는 바닥에 뒹굴던 재용의 우산을 주워 먼지를 툭툭 털고는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나 라면 매운 거 좋아한다. 다음번에 끓일 땐 고춧가루 팍팍 쳐라. 싱거우면 진짜 가만 안 둔다.
민우는 머리 위로 가방을 얹은 채 빗속으로 뛰어갔다. 빗속을 뛰어가는 민우의 등 뒤로 재용은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안경에 맺힌 빗물을 닦아내며 혼자 나지막하게 웃었다. 두 소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이, 여름날 소나기처럼 조금씩 씻겨 내려간 순간이었다.
이 가혹하고도 치열했던 교실의 질식할 것 같은 공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숨구멍은 다름 아닌 야구였다.
1980년대 중반, 대한민국은 야구의 열기로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자라난 재용에게 삼성 라이온즈는 단순한 스포츠팀이 아니라 삶의 가장 빛나는 위안이었다. 특히 마운드 위에서 불꽃 같은 강속구를 뿌려대던 투수 김시진은 소년에게 구원투수나 다름없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한남동 자택의 드넓은 푸른 잔디마당 위로 우렁찬 엔진 소리와 함께 차 한 대가 들어섰다. 문이 열리고 듬직한 체구의 청년이 내렸다. 당대 최고의 에이스 투수, 김시진이었다. 삼전 가문과의 깊은 인연으로 가끔 한남동 자택을 찾았던 그는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용아! 글러브 가지고 안 나오고 뭐 하냐! 마구 던질 테니까 준비해라!
그 목소리가 집 안의 서재까지 들려오자, 이재용은 사방에 흩어져 있던 교과서를 팽개치고 운동화를 구겨 신은 채 마당으로 허겁지겁 뛰어 나갔다. 소년의 얼굴에는 경복고등학교의 무거운 그림자가 완전히 걷혀 있었다. 오직 가슴 설레는 야구 소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선생님! 진짜 세게 던지셔야 합니다! 제 글러브가 찢어질 정도로요!
소년은 붉은 가죽 글러브를 낀 왼손을 허공에 치켜들며 마운드 반대편에 섰다. 김시진은 씩 웃으며 야구공을 가볍게 쥐었다. 손끝에서 튕겨 나간 하얀 야구공이 소리를 내며 대기를 가르고 소년의 글러브를 향해 날아갔다.
펑!

경쾌하고 묵직한 가죽 마찰음이 한남동의 정적을 깨뜨렸다. 공이 글러브 안착 지점에 정확히 꽂힐 때마다 소년의 어깨는 기분 좋게 반동으로 흔들렸다. 김시진은 천천히 거리를 벌리며 소년의 캐치볼 솜씨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 녀석, 제법인데? 제구가 흔들리지 않아. 역시 내 제자답다!
김시진의 칭찬에 소년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김시진의 제자라는 별명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었다. 소년은 마운드에서 에이스가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삼진을 잡기 위해 타자와 벌여야 하는 치열한 심리전을 김시진과의 대화를 통해 체득해 나갔다. 마운드 위에 서면 오직 자신과 포수, 그리고 날아오는 공 하나에만 집중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언론과 비판, 부모의 거대한 그늘 따위는 18.44미터의 마운드 거리 안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소년에게 캐치볼은 세상이 주는 모든 무거운 왕관을 내려놓고 온전히 자신과 공만으로 우주를 채우는 거룩한 수련이었다.
라이온즈의 경기가 열리는 잠실 야구장은 재용과 그의 친구들에게 가장 거대하고 뜨거운 축제의 장이었다. 갈등의 앙금을 털어내고 진짜 친구가 된 민우와 교실 친구들은 재용의 손에 이끌려 야구장 스탠드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파란색 라이온즈 유니폼을 가슴에 안고, 친구들과 찌그러진 페트병을 두드리며 목청껏 노래를 부를 때 재용은 비로소 삼전의 3세가 아닌 경복고 1학년 소년으로 완벽하게 돌아갔다. 라이온즈가 극적인 역전 홈런을 때려내며 마운드 위로 파란색 종이꽃가루가 휘날릴 때, 재용은 옆자리의 민우와 어깨동무를 한 채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불렀다.
이재용, 너 오늘 경기장에 오길 진짜 잘했다! 이 맛에 야구 보는 거지!
민우가 땀에 젖은 얼굴로 재용의 등을 세게 후려치며 소리쳤다. 재용은 아픔도 잊은 채 안경을 치켜올리며 크게 웃었다.
거봐, 내가 라이온즈가 이긴다고 했잖아! 나 오늘 야구장에 나타나면 절대 안 져! 재용불패라고 들어봤냐?
아이들은 재용의 능청스러운 허풍에 야유를 보내면서도 서로의 어깨를 조여 안았다. 그 푸른 함성이 가득 찬 야구장의 열기 속에서, 소년은 비로소 숨을 쉬고 있었다.
진짜 우정은 야구장을 나와 보문동 산자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민우의 옥탑방에서 붉은 꽃을 피웠다.
사방이 어두워진 여름밤,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옥탑방 슬레이트 지붕을 사정없이 두드렸고, 낡은 선풍기 한 대가 목을 삐걱거리며 더운 바람을 힘겹게 뿜어내고 있었다. 좁은 방 안에는 땀 냄새와 사춘기 소년들의 열기가 뒤섞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시선은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부르스타와 그 위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양은냄비에 꽂혀 있었다.
라면 세 개에 스프는 네 개, 그리고 계란 두 개 탁! 라면 끓이는 비법은 타이밍과 불 조절에 있다!
재용은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때보다 더 진지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고 라면 면발을 공기 중으로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며 입바람을 불었다. 면발이 꼬들꼬들하게 익어가는 순간을 포착하는 그의 안목은 흡사 일류 기술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야, 이재용. 너 진짜 삼전 집안 자식 맞냐? 라면 끓이는 꼬락서니가 무슨 시장통 분식집 아들 같네. 너 사실은 한남동 집에서 쫓겨나서 매일 밤 라면만 끓여 먹은 거 아니야?
민우의 장난 섞인 핀잔에 방 안에 모여 앉은 친구들이 박장대소했다. 재용은 전혀 굴하지 않고 냄비 뚜껑으로 냄비를 덮으며 큰소리를 쳤다.
너희들이 라면의 역사와 그 심오한 세계를 알아? 이 양은냄비에 끓여야만 면발의 온도가 순식간에 전달되어서 쫄깃함이 유지된다고. 자, 이제 먹어라! 불기 전에 흡입해!
냄비 뚜껑이 열리자 매콤하고 짭조름한 증기가 옥탑방의 좁은 천장으로 퍼져나갔다. 아이들은 뜨거운 김을 뿜어대며 앞다투어 라면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재용 역시 단정한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양은냄비 뚜껑 위에 라면을 덜어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볼때기에 시뻘건 라면 국물이 튀었지만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그 어떤 산해진미도 보문동 옥탑방의 양은냄비 속 라면보다 맛있을 수 없었다.
라면을 남김없이 비우고 배를 두드리며 누워 있을 때, 재용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방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것은 번쩍이는 금박과 화려한 라틴어 활자가 가득한 오색찬란한 수입 고급 초콜릿 상자였다. 부친 이건희 회장이 해외 출장길에 비서 편으로 서재에 들여다 놓았을, 당시 한국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최고급 명품 디저트였다.

이거, 우리 집 서재에 굴러다니던 건데… 디저트로 하나씩 먹어라. 라면 먹고 나면 단 게 당기잖아.
아이들은 우와 하고 탄성을 지르며 초콜릿 상자를 낚아챘다. 한 입 깨물자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하고 진득한 카카오의 풍미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이재용. 네가 부자라서 진짜 좋은 건 딱 이 초콜릿 하나뿐이다! 매일 밤 라면 끓여주고 초콜릿 상자 가져오면 내가 평생 네 경호원 해준다!
민우의 익살스러운 외침에 옥탑방이 또 한 번 자지러지게 웃음바다로 변했다. 재용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었다. 낡은 창문 너머로 보스턴이나 도쿄의 화려한 빌딩 숲 대신, 서울 변두리의 낡고 낮게 내려앉은 지붕들이 은은한 가로등 불빛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소년 이재용은 그 보문동 옥탑방의 여름밤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라면 스프 냄새와 달콤한 초콜릿 향기, 그리고 친구들의 땀방울 섞인 우정의 내음. 이 소박하고 거친 청춘의 밤이야말로 조부 이병철 창업주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뜨거운 교과서였다. 역사책의 낡은 활자나 차가운 경영학 수식으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타인의 외로움에 공감하는 지혜의 씨앗이 바로 그 허름한 보문동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남몰래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달동네의 가로등 불빛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조용히 소년들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었다. 밤은 깊어갔고, 청춘의 질주는 이제 막 그 찬란한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
[위의 내용을 5000자 이상의 진정한 소설가가 독자의 감정을 흔들어 놓듯이 롤러코스트처럼 떄론 내용의 것할기식이 아닌 진짜 깊은곳까지 몰아가서 깊은 몰입감을 주기도하고 처음에는 훅을 넣었다가 현실에서는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미사어구를 사용해 주기도하고 해서 20회까 지 끌고 갈 거야 지금 이글을 훨씬더 빛나게 만들어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단어는 때로 가장 가벼운 활자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1984년 초봄, 서울 종로구 필운동 경복고등학교의 교무실 창문은 겨우내 엉겨 붙은 석탄 검댕과 매캐한 먼지로 뿌옇게 흐려 있었다. 창살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이른 봄볕조차 온기를 잃고 파리하게 부서지던 그 스산한 오후, 1학년 3반 담임인 국어 교사 강창식은 갱지 냄새가 진동하는 학적부 더미를 넘기다 말고 문득 숨을 멈췄다.
손가락 끝에 닿은 종이 한 장이 유난히 빳빳했다.
이재용.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부친 성명: 이건희.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심장을 쥐고 흔드는 이름. 그 활자를 마주한 순간 강창식의 흉곽 안쪽에서 무언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장안의 내로라하는 세도가와 재벌가의 자제들이 모여드는 경복고라지만, 이 이름 석 자가 주는 중압감은 결이 달랐다. 숨을 삼키며 조심스레 시선을 내린 부친의 직업란. 대기업 회장, 그룹 총수, 혹은 최소한 이사장이라는 거창한 위세가 적혀 있으리라 믿었던 그 네모난 칸 속에는 놀랍도록 단정하고 무미건조한 활자 세 개가 박혀 있었다.
회사원.
강창식은 헛숨을 들이켜며 안경을 고쳐 썼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한민국의 밤낮을 좌우하는 자본의 제왕이, 동네 어귀 버스 정류장에서 헐레벌떡 만원 버스에 몸을 싣는 김 씨나 박 씨와 다를 바 없는 ‘회사원’이라니.
“이 녀석 봐라. 능청스러운 건지, 아니면 일찌감치 세상 눈치를 배운 건지.”
창밖 운동장에서는 낡은 체육복을 입은 사내아이들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축구공 하나를 두고 짐승처럼 엉켜 뒹굴고 있었다. 무릎이 까지고 턱 밑으로 흙탕물이 흘러내리는 저 아수라장 어딘가에, 이 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왕관을 물려받을 소년이 숨어 있을 터였다. 그러나 교실 안에서 그 소년은 언제나 칠판 구석의 분필 가루처럼 조용하고 무색무취했다.
방과 후, 텅 빈 교실 복도 끝에서 헐렁한 감색 교복을 입은 소년이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선생님, 부르셨습니까.”
소년의 목소리는 나지막했고, 고개를 약간 숙인 각도는 지나칠 만큼 공손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소년의 얼굴은 유백색 도자기처럼 맑았지만, 그 눈망울 깊은 곳에는 또래들이 갖지 못한 기묘한 적막이 고여 있었다. 강창식은 학적부를 탁 소리 나게 덮으며 짐짓 굳은 표정으로 소년을 쏘아보았다.
“재용아. 네 아버지가 이건희 회장님이신데, 직업란에 회사원이라고 적어 둔 까닭이 뭐냐? 담임 선생이 촌지라도 뜯어낼까 봐 겁이 나서 밑밥을 깐 게냐, 아니면 날 시험해 보려는 게냐?”
선생의 장난 섞인 힐난에 소년의 흰 뺨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소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손을 단정히 모아 쥐었다. 그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가늘게 떨려 왔다.
“진짜 회사원이 맞으십니다, 선생님.”
소년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한 음절 한 음절마다 묘하게 단단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양복을 입고 나가셔서 밤늦게 서류 더미를 안고 돌아오십니다. 제 눈에는 그저 나라를 위해, 공장을 돌리기 위해 매일 피땀 흘려 일하시는 수많은 회사원 중 한 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저 친구들과 똑같이 학교에 다니고 싶었습니다. 튀고 싶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소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강창식의 가슴속으로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이 아이는 교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제 신분을 숨기기 위해 거짓을 쓴 것이 아니었다. 제 어깨에 얹힌 거대한 가문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흙먼지 나는 일상의 바닥으로 필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아이 특유의 지독한 조심성과 외로움. 강창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소년의 어깨를 툭 쳤다.
“알았다, 녀석아. 들어가 봐라. 내일부터 교실 바닥 왁스 칠이나 제대로 해.”
“예! 감사합니다, 선생님!”
환하게 번지는 소년의 미소 뒤로 문이 닫혔지만, 세상의 벽은 소년의 바람처럼 녹록하지 않았다.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삼성의 황태자’라는 낙인은 빗물이 스며들듯 소년의 등 뒤를 따라다녔다.
특히 교실 맨 뒷자리, 늘 찢어진 가죽 가방을 팽개쳐 두고 엎드려 자던 민우에게 이재용은 존재 자체로 모욕이었다. 산동네 좁아터진 단칸방에서 연탄가스를 마시며 자란 민우는 매일 밤 주유소와 신문 배달판을 구르며 새벽을 맞이하던 소년이었다. 뼈마디가 굵고 손톱 밑에 늘 기름때가 박혀 있던 민우에게, 구김 하나 없는 와이셔츠에서 은은한 섬유유연제 냄새를 풍기는 이재용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살갗을 긁어대는 가시 같았다.
기폭제는 영어 수업 시간이었다. 외국인 선교사 출신 강사의 날 선 질문에, 재용이 유려하고 매끄러운 억양으로 막힘없이 대답을 쏟아낸 순간이었다. 교실 안은 경탄으로 쥐 죽은 듯 가라앉았고, 교사는 감탄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때, 교실 뒤편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에이, 혓바닥에 버터 처바르고 지랄이네. 귓구멍 썩겠다.”
민우의 빈정거림에 교실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 재용의 등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쥐고 있던 영어 교과서의 모서리가 소년의 손아귀 안에서 사정없이 구겨졌다. 민우는 다리를 책상 위에 걸친 채 침을 뱉는 시늉을 하며 재용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너와 나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멸시와 독기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날 방과 후, 하늘은 잿빛으로 내려앉더니 늦은 봄비치고는 사납고 굵은 장대비를 쏟아냈다. 우산이 없던 민우는 비에 젖은 가방을 머리에 인 채 스탠드 처마 밑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흙탕물이 발목까지 튀어 오르던 그때, 회색 우산 하나가 민우의 머리 위로 불쑥 드리워졌다.
“같이 쓰자. 나 한남동 쪽으로 가는데, 너희 동네 입구까지 태워다 줄게.”
단정하게 우산을 받쳐 든 재용의 눈동자는 티 없이 맑았다. 그러나 그 순수한 호의는 민우의 짓무른 자존심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이거 안 치워?”
민우가 사납게 우산대를 쳐냈다. 우산이 흙바닥으로 나뒹굴며 차가운 빗물이 두 소년의 머리통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야, 이재용. 가식 좀 작작 떨어라. 네가 우리랑 똑같은 감색 교복 걸치고 얌전 빼고 앉아 있으니까, 진짜 네가 우리랑 같은 인간인 줄 아냐? 네가 산동네 자취방에서 썩은 냄새 맡아봤어? 하루라도 끼니 걱정하면서 굶어본 적 있어? 어차피 몇 년 뒤면 미국으로 유럽으로 훨훨 날아가서 우리 대가리 꼭대기에서 군림할 놈이, 왜 여기서 서민 놀이 하면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데! 네 역겨운 동정심 따위 엿이나 처먹어!”
빗물과 함께 쏟아져 내린 것은 한 소년이 세상의 불공평함을 향해 토해내는 피 섞인 비명이었다.
그 순간, 늘 온화하게 미소 짓던 재용의 얼굴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소년의 눈빛에 푸른 번개가 쳤다. 재용은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걷어차 버리고는 번개처럼 달려들어 민우의 멱살을 낚아챘다.
“내 말이 가식 같아? 내가 가진 게 죄야?”
늘 얌전하던 소년의 입에서 짐승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민우는 예상치 못한 억센 악력에 숨을 들이켰다. 재용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빗물만이 아니었다. 뜨겁게 끓어오른 소년의 눈물이 빗물과 뒤섞여 턱 끝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이 집안에 태어난 줄 알아?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내 이름 뒤에 붙은 수만 명의 목숨값이 무서워서 숨이 막혀! 나도 그냥 너희처럼 축구하고, 라면 끓여 먹고, 아무 생각 없이 낄낄대고 싶었어! 왜 내 진심은 한 번도 안 보고, 너희 멋대로 날 껍데기 취급하는데!”
장대비가 사정없이 두 소년의 어깨를 난타했다. 민우의 옷깃을 틀어쥔 재용의 주먹은 핏기가 가신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 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감옥에 갇힌 한 십 대 소년의 지독한 고독과 결핍이 날것 그대로 박혀 있었다.
민우는 움켜쥐려던 주먹의 힘을 스르륵 풀었다. 재용의 눈 속에 비친 것은 오만한 재벌 3세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시선에 포위되어 상처 입은 채 헐떡이는, 자신과 똑같이 불완전하고 가여운 열일곱의 사내아이였다.
침묵 끝에 민우가 빗물을 퉤 뱉으며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진짜 더럽게 멍청한 놈이네. 그 많은 돈을 쥐고도 여기서 질질 짜고 앉아 있냐.”
민우는 진흙투성이가 된 우산을 주워 빗물을 털어내더니 재용의 가슴팍에 툭 안겨주었다.
“나 라면 불은 거 딱 질색이다. 다음번에 우리 집 와서 끓일 땐 물 맞추기나 잘해라. 싱거우면 진짜 패버린다.”
민우가 머리 위로 가방을 뒤집어쓰고 빗속을 성큼성큼 뛰어갔다. 빗줄기 너머로 멀어지는 거친 소년의 등 뒤에서, 재용은 흙 묻은 안경을 벗어 빗물에 헹궈 쓰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차가운 빗속에서, 두 소년을 가로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철옹성은 비로소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 무겁고도 숨 막히는 현실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해방구는 야구였다.
그 시절의 야구는 소년 이재용에게 단순한 유희가 아닌 성소(聖所)였다. 특히 마운드 위에서 고독하게 타자를 압살하던 삼성 라이온즈의 전설, 투수 김시진은 소년의 우상이자 은밀한 스승이었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가 되면, 한남동 자택의 드넓은 잔디밭 위로 묵직한 배기음과 함께 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거구의 김시진이 차 문을 열고 내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재용아! 글러브 챙겨라! 오늘은 손바닥 불나게 던져줄 테니까!”
서재에서 책을 파고들던 소년은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펜을 던져두고 맨발로 뛰어나왔다. 붉은 가죽 글러브를 낀 소년의 얼굴에는 경복고의 모범생도, 그룹의 후계자라는 그림자도 없었다. 오직 마운드의 흙냄새를 갈망하는 야구 소년만이 서 있었다.
펑-!
김시진의 손끝을 떠난 하얀 실밥의 야구공이 대기를 찢으며 소년의 글러브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 포수 미트가 찢어질 듯한 파열음과 함께 소년의 팔꿈치와 어깨로 묵직한 충격파가 전해졌다. 손바닥이 얼얼하게 타올랐지만, 소년은 이를 악물며 공을 되던졌다.
“팔꿈치 각도 올려라! 타자의 눈을 피하지 마! 마운드에 올라선 투수는 세상에 혼자뿐인 거다!”
김시진의 외침은 소년의 뼛속 깊이 각인되었다. 투수와 타자 사이의 거리, 18.44미터. 그 고독한 공간 안에서는 가문의 배경도, 막대한 부도 아무런 방패가 되지 못했다. 오직 자신이 던진 공 하나의 궤적과 그것을 지켜보는 타자의 눈빛만이 진실이었다. 소년은 캐치볼의 둔중한 타격음을 통해, 훗날 자신이 짊어져야 할 거대한 고독을 홀로 견뎌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 해방감의 절정은 잠실 야구장의 푸른 관중석이었다.
비 온 뒤 진짜 친구가 된 민우와 녀석들을 이끌고 야구장을 찾은 날, 재용은 찌그러진 페트병을 두드리며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불렀다. 9회 말 투아웃, 라이온즈의 극적인 역전 만루 홈런이 터져 나온 순간, 야구장은 푸른 함성의 용광로로 변했다.
“이재용! 봤냐! 넘어갔다!”
민우가 땀에 절은 재용의 목을 감아쥐며 포효했고, 재용 역시 안경이 비뚤어진 채 민우의 등을 두드리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경계가 지워진 채, 오직 푸른 유니폼을 입은 소년들의 뜨거운 심장 소리만이 잠실의 밤하늘을 울렸다.
그리고 그 찬란한 청춘의 열기는, 마침내 보문동 산자락 낡은 옥탑방의 찌그러진 양은냄비 속에서 가장 붉고 진한 꽃을 피워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열대야의 여름밤, 슬레이트 지붕 위로 매미 소리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목이 삐걱거리는 낡은 선풍기가 더운 바람을 힘겹게 밀어내던 좁아터진 방 한가운데, 낡은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서 양은냄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라면 세 개, 스프는 세 개 반, 물은 정량보다 딱 반 컵 적게! 계란은 풀지 말고 통으로 넣어서 흰자만 익힌다!”
재용은 나무젓가락을 들고 면발을 공기 중으로 쉼 없이 들어 올렸다 내리며 후후 입바람을 불었다. 단정한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채 면발의 탄력을 체크하는 소년의 눈빛은, 연구실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들여다보는 수석 연구원의 그것보다 더 서슬 퍼렇게 빛났다.
“야, 재용이 저 새끼 봐라. 라면 끓이는데 무슨 국보 다루듯이 하네. 너 진짜 집에서 쫓겨나면 신설동 로터리에 분식집 차려라. 내가 매일 팔아줄게.”
민우의 짓궂은 농담에 방 안에 웅크려 앉아 있던 친구들이 방바닥을 치며 자지러졌다.
“시끄러워, 불 조절이 생명이야. 이 얇은 양은냄비의 열전도율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자, 뚜껑 연다. 덤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뻘건 라면 국물 속으로 대여섯 개의 젓가락이 맹수처럼 파고들었다. 재용 역시 냄비 뚜껑을 앞접시 삼아 뜨거운 면발을 허겁지겁 입안 가득 욱여넣었다.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히고 단정한 턱 밑으로 라면 국물이 튀었지만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최고급 호텔의 정갈한 만찬을 수없이 맛보았던 소년이었지만, 땀 냄새 밴 친구들의 어깨가 맞닿은 채 들이켜는 맵고 짠 라면 국물보다 황홀한 맛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바닥까지 국물을 싹싹 비워낸 뒤 아이들이 배를 두드리며 널브러졌을 때, 재용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가방 깊숙한 곳에서 묵직한 틴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금박의 라틴어 활자가 번쩍이는, 당시 한국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스위스산 최고급 수제 초콜릿 상자였다. 부친의 서재 한구석에 놓여 있던 것을 몰래 챙겨온 것이었다.
“이거… 라면 먹고 나서 단 거 먹으면 맛있거든. 하나씩 먹어봐.”
조심스레 뚜껑을 열자 옥탑방의 퀴퀴한 땀 냄새 사이로 묵직하고 매혹적인 카카오 향이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아이들은 탄성을 지르며 초콜릿 덩어리를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야, 이재용. 네가 부잣집 도련님이라 좋은 건 딱 이 초콜릿 하나네! 라면 끓여주고 이 쪼꼬렛만 맨날 가져오면 내가 평생 네 꼬붕 해준다!”
민우의 익살스러운 외침에 옥탑방 슬레이트 지붕이 들썩이도록 웃음보가 터졌다.
재용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낡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앞에는 뉴욕이나 도쿄의 화려한 스카이라인 대신, 가파른 달동네 골목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기와지붕들과 주황색 보안등 불빛이 은하수처럼 낮게 깔려 있었다.

라면 스프의 매캐한 향과 입안 가득 감도는 쌉싸름하고 달콤한 카카오의 여운, 그리고 살을 맞댄 친구들의 뜨거운 체온.
소년 이재용은 그 보문동 옥탑방의 공기를 가슴 깊은 곳까지 들이마셨다. 조부 이병철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던 ‘인재(人材)’와 ‘인간에 대한 혜안’은 가문의 두꺼운 서책 속에 있지 않았다. 차가운 흙바닥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핍과 분노, 그리고 그 결핍을 나누며 피어나는 눈물겨운 온기를 직접 살갗으로 느끼는 것.
훗날 거대한 제국을 짊어지고 거친 풍랑을 헤쳐 나가야 할 소년의 영혼 밑바닥에, 가장 인간적인 공감의 씨앗이 바로 그 허름한 양은냄비 밑바닥에서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달동네의 가로등 불빛이 밤하늘의 성좌처럼 소년들의 땀 젖은 이마를 비추고 있었다. 밤은 깊었으나, 그들의 찬란한 궤적은 이제 막 거대한 첫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대하소설 《푸른 고삐와 거인의 왕관 — 삼성 이재용편》 연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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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대하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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